"축복의 땅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는 희망이 되도록 잠시 죽어 있는 겨울나무의 마른가지에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이고 싶다." 

 
사계절 중에서 어느 계절이 제일 좋을까. 같은 계절이라도 세월의 행간을 건너 갈 때 마다 피부에 와 닿는 계절의 감각 역시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리라. 

마른 가지에서 꽃망울 터트리듯 찾아든 봄날 같은 초년, 불타는 여름의 열정으로 보낸 청년, 가을 추수기를 닮은 황금빛 장년, 겨울나무처럼 모든 세속의 욕심을 털어버리고 되돌아 갈 길을 준비하는 노년……. 자신의 계절을 스스로 인지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생을 모나지 않게,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까. 

5년 전이었나, 스스로를 가두었던 울타리를 벗어나 다시 20대 열망의 날들로 돌아가고 싶었던 날. 우리들 다섯 부부는 승합차 두 대에 나눠 타고 몰고 속초에 도착, 영랑호 주변에 여장을 풀었다.
 
한적한 곳에 두 차의 꽁무니를 맞대어 놓고 그 사이에 자리를 깔아 술판부터 벌렸다. 술이 거나해지자 카스트레오에서 나오는 음악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 그 당시 유행하던 춤곡 라밤바의 경쾌한 리듬이 영랑호까지 출렁이게 했다. 술기운에 나중에는 부인들까지 합세하여 마음껏 몸을 흔들어댔다.
   
모처럼 젊었던 시절을 되살려 체면의 틀을 깬다는 일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일상에서의 탈출은 누구나 꿈꾸는 일인데 그동안 무엇이 우리를 옭아매었는지.
 
하지만 그 신나는 놀이도 잠시, 젊은이들이 눈에 띄면서 우리들만의 놀이는 전기 나간 확성기 소리처럼 자자들었다. 세월의 주름과 체면의 나이테, 아직은 젊다는 생각으로 살아 왔는데 또 다른 젊음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하얀 세월이 되고 말았다.
   
내 나이가 사십일 때는 삼십대를 아쉬워했고, 오십이 되어서는 가는 사십대가 부러웠다. 그래도 나는 생물학적 나이보다는 젊은 생각을 하면서 나이 듦에 대해 무신경하게 살아 왔다. 그러나 설혹 나이보다 젊어 보이더라도 손자가 있다면 한 세대의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아직까지는 나이든 취급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젊은이들이 먼저 양보를 해 오곤 했다. 마뜩찮은 일이지만 친구들 모임을 제외하고는 어딜 가나 웃어른으로 모양새를 잡아야 할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머리는 가뭇없이 희어지기 시작했고,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손윗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나이든 아쉬움이 크지만 직장생활을 할 때는 상급자 되는 것이 목표였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진급을 빨리한다는 것은 주변의 사람들이 그만큼 빨리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원일 때는 같은 부서의 사십 명이 동료였지만, 과장이 되자 동료가 다섯으로 줄었다. 수직상승, 높은 자리, 그것은 내 실존에 외로움을 안겨 주기도 했다. 지위가 오르면 오를수록 더 고독해지고, 경계해야 할 사람들이 많아졌다. 모든 것을 혼자서 결정해야 했다.
 
진급이 빠른 사람들이 도리어 빨리 퇴출된다는 사실도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된다. 세상의 이치는 참으로 오묘 하지 않는가. 빠르다고 기뻐하기 보다는 조금 늦어도 느린 걸음에 익숙해지면서 사는 것이 살아가는 지혜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 그는 헐벗은 나뭇가지에서 여름날의 무성했던 나뭇잎들의 전언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십여 년 전이었나, 내 또래의 외국인 화가에게 우리 강산의 빼어난 경치를 보여줄 기회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계절이 겨울이라 산의 풍경은 여름 같지 않았고 아름답게 무지개까지 피어나던 폭포는 얼음으로 변하여 고체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나뭇잎들이 다 떨어진 겨울나무는 앙상한 등줄기만 보인 채 산등을 덮었고, 거대한 고슴도치가 되어 웅크리고 있었다. 

겨울나무의 아린 신음을 알아차린 그는 점잖은 눈빛으로 내 눈치를 보더니, 얼음장 밑으로 귀를 가만히 대어 보면 폭포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와 숲속의 새들 노래 소리까지도 속살대듯 들린다고 말했다. 
 
그는 헐벗은 나뭇가지에서 여름날의 무성했던 나뭇잎들의 전언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겨울나무는 뽀얀 솜털 옷으로 꽃눈을 꼭꼭 싸매며 바람소리를 듣고 있었다. 두 그루 겨울나무가 된 그와 나는 고슴도치 산등성의 늦은 겨울바람도 춥지 않은 듯 의미 있는 미소를 주고받았다.
   
정년의 나이가 다가오면 외로움이 스멀거리고 날이 더 할수록 뇌세포의 사멸수치는 점점 많아질 것이 뻔하다. 몸도 퇴행성증후군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열심히 하던 운동도 나이에 맞게 서서히 줄여가야 한다. 퇴색해가는 나뭇잎이 되어가는 것이다. 결국 나뭇잎이 지듯이 쓸쓸한 노년의 뜨락으로 들어서게 된다.
   
다가올 겨울을 미리 알고 있는 나무들은 옷을 벗어내면서 야물게 겨울을 준비한다. 묘목처럼 아장대던 자식들이 다 자라 여윌 때가 되면, 잎 털어내는 나무처럼 더 늦기 전에, 모진 겨울에 대비하여 자신의 옷을 벗어버릴 줄 아는 나무의 지혜가 부럽다.
   
긴 겨울이 지나면 또 봄은 오리라. 언 땅을 녹여낼 씨 한 톨 쯤 장만해 둘 수 있는 겨울을 맞으면 좋으리. 한 톨의 씨앗이 자라 울창한 숲을 이루는 날들을 그려본다. 축복의 땅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는 희망이 되도록 나도 잠시 죽어 있는 겨울나무의 마른가지에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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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규는 삶의 다원적 변수를 운치와 여운의 하모니 가득한 관용하에 삶의 동일체로 이끄는 심플리스트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어 그의 수필은 가히 생명의 빛이라 할 수 있다.

삶의 무게 진솔하게 풀어내는 1949년 진도생의 박종규 작가는
 
14세에 이미 원고지 2,000매를 써 문학의 길을 예비했지만 서울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한 미술학도였다. 그 원고지가 ‘주앙마잘’ 이라는 소설로 태어난 것이 1995년, 글이 잉태된 지 32년만이었다.

2001년에는 의문사를 다룬 2부작 장편소설 ‘파란비’를 출간하여 추리적 기법과 반전의 묘로 화제를 모았다.

2007년 발간된 에세이집 ‘바다칸타타’는 독특한 편집과 이벤트성 퍼포먼스로 수필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표지가 없이 출간된 책, 들려주는 낭독수필집, ‘수필계의 게릴라’ 외에도 휴머니티를 실천하는 작가라는 평에 걸맞게 문화소외계층을 찾아다니며 벌리는 퍼포먼스는 한 작가의 역량을 이미 넘어서고 있다.

국립군산대학에서 광고디자인을 강의하는 그는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회원이며, 에세이스트문학회장을 역임했고, 문학동인 글숲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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